‘최락도’하면 3선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제 출신 정치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은 내공을 가진 ‘군산 촌놈’ 최락도 화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지만 불우했기에 더욱 붓을 꺾지 않은 사람. 군산 땅에 작은 울림을 주는 ‘은둔의 화가’, ‘군산의 밀레’ 최락도의 이야기는 작은 울림을 준다.
◆ 군산 사람, 화가 최락도
1940년생인 ‘홍대미대’ 출신의 군산 사람 최락도. 군산의 명문 군산고를 나왔고 그림의 엘리트 코스인 홍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1980년 즈음 그는 군산에서 독보적이었다. ‘미스터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 전성기 때엔 추상의 세계를 탐닉했다.
“방마닥만한 캔버스에 몸으로 손으로 물감을 던지고 문지르는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추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락도 선생. 그러나 현실은 항상 암울하다.
1980년대의 락도는 예술가, 아니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면 ‘탕아’, 또는 ‘부랑아’로 불릴 정도로 괴팍했고 폭주했다.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게 그를 고립시켰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아갔다.
화단의 풍운아로 기억되는 반항적 이미지가 그의 화폭에 가득했다. 펄펄 살아 숨 쉬는 그의 작품 속에 언제나 용광로같은 에너지가 넘쳤다. 그러나 시련의 시대를 겪으면서 절망의 모습들로 뒤바뀐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하나의 화폭 안에 담아내려고 했던 그의 순수와 열정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고뇌와 고뇌를 거듭하는 그의 예술적 깊이를 떠올려주는 어두운 덧칠의 세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80객 노신사에게 실례의 말씀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가라고 흔히 말하는 이들의 작품을 보면 시쳇말로 ‘미치겠는 거야’.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거든, 그런데 그러질 못했어. 후회되지.” 한 때 서울 인사동에서도 잘나가는 작가였다.
군산여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던 낙도는 전업 작가를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사를 그만두게 된다. “군산예총 일만하면 모든 게 풀릴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예총 사무국장 일을 했지만 남는 건 빚뿐이었다.
그 시절, 회현면의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 2층 집을 사서 비둘기 방에는 작업실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작품을 하면서 힘들었다. 그 때부터 긴 시간동안 후회와 애증이 세월이 겹쳤다.
◆ 필생의 작업을 준비하는 락도
회현면에서 불우했던 그는 한 때 나운성당에서 작업실을 마련해 주어서 안식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여 비틀기 시작한 그의 불같은 성격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울리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에서의 관계라는 건 ‘처세’와도 비슷한 일이다. 사람 좋은 그였지만 사람들이 삐틀어지게 바라보자 그 또한 질세라 삐툴게 나가 버렸다. “술을 먹어도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고, 뭘 해도 마음이 삭여지지가 않더라고.” 그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슴 터지는 사연들을 삭이지 못한 게 하반신 마비로 이어졌다. 그의 절망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락도가 선천적으로 장애이거나, 교통사고 등으로 발을 저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긴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감을 풀고 색을 입히고 있었다.
홍대 시절,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면서 스승인 ‘수화 김환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였다. 내년이면 여든을 맞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덥수룩한 수염도 간 데 없다.
불우한 시기를 보내면서 추상의 세계를 떠나 한 동안 반추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그. 이제 필생의 작업을 준비 중이다. 내년쯤 어쩌면 그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개인전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찾는 이들에게 간간이 한 점식 그려주기는 했지. 이번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혀.” 필자는 11년전 락도의 ‘가을이 가는 소리’를 주제로 전람회를 열어준 인연이 있다. 이번에도 ‘총대’를 메 볼 생각이다.
한창 때인 40대의 최락도는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검은색 톤의 추상화로 미술계를 압도했다. 그는 화가들이 흔히 죽음의 색이라 피했던 짙은 청색과 검은색 톤을 당시에도 반항적으로 사용했다. 그런 정열과 도전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때론 악동 같았고, 때론 돈키호테 같았던 ‘방황과 질주’의 화가 최락도. 그 또한 세월 앞에서 어느덧 원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군산에 사는 군산인이다. (최락도 화백 전화 010-7917-0040)
/채명룡 = 본지 편집국장
채명룡 / 2018.06.25 22:3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