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작가를 위해 살았던 회현면에서의 락도는 불우했다. 그는 한 때 나운성당에서 화실을 만들어줘 안식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여 비틀어지기 시작한 그의 불같은 성격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울리지 않았다.
나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마음을 비워갔다. 요즘 그는 10평의 공간에서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건 그도 잘 안다.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불꽃을 생각하고 있다.
◆ 필생의 작업을 준비하는 락도
지방 소도시에서의 관계라는 건 ‘처세’와도 비슷한 일이다. 사람 좋은 그였지만 사람들이 삐틀어지게 바라보자 그 또한 질세라 삐툴게 나가 버렸다. “술을 먹어도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고, 뭘 해도 마음이 삭여지지가 않더라고.” 그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슴 터지는 사연들을 삭이지 못한 게 하반신 마비로 이어졌다. 그의 절망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락도가 선천적으로 장애이거나, 교통사고 등으로 발을 저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긴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감을 풀고 색을 입히고 있었다.
홍대 시절,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면서 스승인 ‘수화 김환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였다. 내년이면 여든을 맞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덥수룩한 수염도 간 데 없다.
불우한 시기를 보내면서 추상의 세계를 떠나 한 동안 반추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그. 이제 필생의 작업을 준비 중이다. 내년쯤 어쩌면 그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개인전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찾는 이들에게 간간이 한 점식 그려주기는 했지. 이번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혀.” 필자는 11년전 락도의 ‘가을이 가는 소리’를 주제로 전람회를 열어준 인연이 있다. 이번에도 ‘총대’를 메 볼 생각이다.
한창 때인 40대의 최락도는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검은색 톤의 추상화로 미술계를 압도했다. 그는 화가들이 흔히 죽음의 색이라 피했던 짙은 청색과 검은색 톤을 당시에도 반항적으로 사용했다. 그런 정열과 도전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때론 악동 같았고, 때론 돈키호테 같았던 ‘방황과 질주’의 화가 최락도. 그 또한 세월 앞에서 어느덧 원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군산에 사는 군산인이다.<계속>
(본지 편집국장)
채명룡 / 2018.07.11 09: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