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곳은 어디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법(法)과 규범(規範)이 있다. 모두의 이익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법은 궁극적으로 “법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론(理想論)일 뿐, 현실은 법에 의해서만 질서와 안정이 유지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다. 누구든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법은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만 권리를 보장한다. 철저한 의무. 권리의 관계의 관계가 법이다.
준법에 관한 유명한 애기로 ‘소크라테스의 약사발’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의 약사발을 받기 전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악법(惡法)도 법(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며 죽어 갔다.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옳을까 그를까’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다. 악법의 폐기에 앞장서지 못한 것은 소극적인 것이라는 것과 준법의 정신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약사발’에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비록 그 법이 악법이라 하더라도 평등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법이 법답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평등하해야 한다.
누구는 터럭만한 잘못을 해도 엄한 규제를 받는데 어떤 사람은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는다면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약사발을 태연하게 받은 것은 정의(正義)에는 설사 옳지 않다하더라도 적용에 있어서만은 평등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에 부합되지 않은 법이라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법철학적인 문제이므로 일단 론외(論外)로 한다면 곤정하게 집행되는 법은 일단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
불교의 계율정신은 준법에 관한 문제에 있어 많은 본보기를 준다. 계율은 승단 구성원의 조화롭고 질서 있는 생활을 위한 규범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무사하다.
한번 정해진 계율 앞에서는 부처님도 절대로 예외가 될 수 없다. 율장에 보면 집단 수행인 여름안거가 끝나는 날 부처님은 제자들과 엄숙하게 부처님 자신부터 자그마한 허물까지 대중 앞에 드러내어 자자(自恣) 참회를 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자’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수행하면서 저질러져온 허물인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인데 부처님께서 가장먼저 일어나 대중들에게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대중들이여,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보고 듣고 생각함에 허물이 없었는가. 만약 허물이 있었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 그것을 지적해 달라. 나는 간절히 참회하겠노라.”
물론 부처님에는 허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인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묻는 부처님의 태도는 지계(持戒)인 준법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
법이란 위에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바람風”이라 하지만 너는 “바람風”을 하라면 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의 모양을 보면 법을 지키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요, 법을 크게 어기는 것은 모두가 높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교묘하게 법망(法網)을 피해 탈세를 하는가 하면 폭력을 막아야 할 사람들이 폭력에 앞장을 서니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래가지고야 법이 법답게 지켜질 리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약사발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내려져야 하겠다.
송월 스님 / 2021.10.06 09: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