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 때 불안청원스님은 이런 말씀으로 후학을 가르쳤다. “털끝까지 보는 사람도 자기 눈은 보지 못하고 천근을 드는 사람도 자신의 몸은 들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일에는 밝으면서 자기를 용서하는 잘못에는 어둡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으면 평소 자기가 갖고 있던 단점이나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크게 확대해 나무란다.
그뿐이랴, 고소나 고발 악담 댓 글로 써 사람을 사회로부터 매장을 시키기 위한 작정을 하고 있다. 참으로 되갚음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남의 잘못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결코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기회로 남을 능멸하는 것은 더 나쁘고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남의 잘못을 고치지기는 커녕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자신은 더 큰 잘못을 저 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누구도 허물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누구도 뒤를 들춰보면 작은 허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흔히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할 때 그 사람은 완전무결한 완벽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허물 많은 보통사람보다 그 정정도가 훨씬 덜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써 최고의 완벽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부처님께서도 허물은 있을 수 있다. 인격적인 허물은 아니었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단은 ‘완벽한 인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의 제자였던 데바닷다의 배신, 외도(外道)의 비난이 그 좋은 예다. 이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예수나 공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비난 받지 않은 있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유난히 자신만이 비난을 받는 줄 안다. 부처님이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들 조차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기가 어려웠다면 우리와 같이 보통 사람으로써는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음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남에게 관용과 용서를 바라는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을 매몰차게 비난만 한다면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남도 그렇게 비난하게 된다.
이 세상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주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서지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같은 허물이 반목될 수 있는 사회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남의 잘못을 놓고 무조건 헐뜯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럴 수 있음을 먼저 생각 하자는 것이다.
상응부경에서 부처님은 남의 허물을 보고 공연히 우쭐해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있다. “남의 허물을 보고 우둔한 자는 욕과 비방을 늘어놓고 교만해진다. 그러나 승리는 이를 참고 옳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것이다.”
남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에 더 엄격해 보자.
송월스님 / 2021.05.12 13:3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