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인가 몇 사람의 동료 스님과 뉴욕주의 “베어 마운틴”을 여행하게 되었다.
저녁때가 되어 식당을 찾게 되었는데 상당히 넓은 홀에서 수많은 손님들이 저녁식사의 즐거움을 만끽(滿喫)하고 있었다. 우리도 뒤늦게 한 테이블을 얻어 종업원이 마련해준 저녁을 막 들려고 하는데 찰라 갑자기 뒤에서 천정이 무너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 키만큼이 쌓아놓았던 세줄의 접시 더미가 여종업원의 실수로 무너져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 순간 이였다.
접시가 깨지는 순간과 거의 동시에 옆 좌석의 몇 분의 노신사들이 힘찬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종업원 실수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큰 박수였다.
나는 그 순간 ‘아! 바로 이것이 서양인의 여유로구나.’ 화부터 내고 소리지르는 우리와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을 가득 채운 손님들 시선으로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 여종업원은 노신사분들이 던진 박수로 인하여 다시 여유를 찾고 그 산산조각이 난 접시들을 줍고 있던 그 미소 짓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는 몇 년 동안 지금의 성흥사 새 터전을 마련하여 불사(佛事) 관계로 이런 저런 교통편을 이용하게 된다. 때로는 승용차도 트럭도 택시도 이곳 저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거의 매일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항상 아쉬운 것은 운전자들이 너무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 촌보의 양보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끼어 들어와도 경적을 사정없이 울려대고 가차 없이 욕지거리를 한다.
이런 상황을 거의 매일 경험하면서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처럼 성급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보다 소득이 적은 홍콩이나 베트남과 북경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경적 울리는 것은 극소수이다.
이토록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게 되겠나 하는 씁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잡아함경에 보면 “중생은 언제나 경계와 함께하고 경계와 화합하느니라. 어떻게 경계와 함께하는가. 이른바 중생은 착하지 않은 마음을 쓸 때에는 좋지 않은 경계와 함께하고, 착한 마음을 가질 때에는 좋은 경계와 함께하며, 훌륭한 마음을 가질 때에는 훌륭한 경계와 함께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질 때는 더러운 경계와 함께 하느니라.”
우리는 하루 이틀 살다 그만두는 삶이 아니다. 아직 살아온 날보다는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인생의 도정에서 즐거움도 적지 않다. 여러 번 치는 차인벨 소리보다 한번 치는 웅장한 범종소리가 은은하게 세상을 울린다.
5분 먼저 가려다 50분 먼저 간다 하였다. 조급하고 짜증으로 일을 망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참고 여유를 찾고자 노력하는 생활태도가 무엇보다 중요 할 것이다.
송월 스님 / 2020.12.31 10: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