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처럼 가는 곳마다 종교도 많고 종교의 시설이 많은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는 가면 갈수록 인정이 메마르고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그저 목말라 하는 갈애(渴愛)라는 욕망 때문에 중(中)을 회복하지 못 해서이다. 세상은 넓기 때문에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태 또한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다.
그런데 흔히들 이렇게 다양한 삶의 문제를 쉽게 이원적으로 구분 지으려 한다. 잘난 사람 못남 사람, 가진 사람 못가진 자, 높은 이, 낮은이.... 이렇듯 대립적인 형태로의 구분은 끝이 없을 것이다.
대립은 대립을 낳고 계급은 계급을 부를 뿐이다. 강 한자가 약 한자 자위에 군림하는 것이 문제이듯이 약 한자가 강 한자를 이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서로간의 자리가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 하듯이 못난이는 보호를 받아야 하며 못 가진 자는 좀 더 분배 받아야 하고, 낮은 사람은 제 목소리로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잘 난이는 겸허해져야 하며, 가진 자는 정당해져야 하고, 높은 자 일수록 성실 해져야 평등한 사회가 된다.
이와 똑 같은 깊이로 세상 모든 생명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보살이요 자비요 신(神)의 사랑이리라.
정녕, 한 종교가 인간은 그들의 자성(自性)이 같고 신(神)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려면, 바다가 모든 산물을 받아 들이 듯이 종교인은 어떤 인간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종교의 대상은 인류 전체, 나아가 생명 전체이지 가 진자, 높은 이, 친한 이, 잘난 사람만을 위한 것도, 못가진자, 낮은 이, 싫은 자, 못난 사람, 자기편만 위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못나고, 못가지고, 낮은 이들의 힘과 권리와 자유를 위해 정열을 쏟는 만큼, 종교를 믿거나 권하거나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겸허하고 성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록 믿음은 갖지 않았지만 동일한 인간이며 생명체이므로 편 가르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여야 한다. 요즈음 여러 종교에서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 민족을 위한 종교, 국가를 생각하는 종교를 위한 목소리가 높다.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낮은 편에는 또 다른 계급, 민족 국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게 염려스럽다. 자칫 잘못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대립과 갈등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길이 다수를 위한 길이라면, 종교의 길은 전체를 위한 길이다. 정치인이 저버린 소수를 위하여, 끝까지 연민의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 종교인의 길이다.
밝은 햇빛처럼 모두에게 골고루 퍼부어가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 함들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송월 스님 / 2020.07.29 16:5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