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관운장이 하비성 싸움에서 조조의 포로가 되어 지낼 때의 일이다. 조조가 관운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급 비단옷 한 벌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조조가 어느 날 그를 보니 그 전에 입던 허름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조조가 물었다. “내가 비단옷을 보내준 일이 있는데 왜 입지 않았소” 그러자 관운장이 입은 옷을 들춰 보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기 속에 입고 있습니다”
조조가 다시 물었다. “새 옷이 생겼으면 헌옷을 벗어야지. 왜 아직도 그대로 입고 있소. 또 껴입을 것 같으면 헌옷을 안에 입고 새 옷을 위에 입어야 하지 않겠소”
이에 관운장이 대답했다. “물론 그리해야 하겠지만, 이 위에 입은 옷은 우리 주군께서 내려주신 옷입니다” 여기서 주군은 말할 것도 없이 유비를 일컫는다.
이는 관운장의 유비에 대한 신의(信義)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 후 관운장이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로 돌아간 뒤 저 유명한 적벽대전이 일어났다.
그 때 그 싸움에서 수염을 그슬리는 수모까지 당하며 참패한 조조가 초라한 행색으로 쫓겨 가면서도 세 번째 웃었다는 조조 삼소처(三笑處)인 화용도라는 곳에서의 일이다. 그 때 그 길목을 지키고 있던 장수가 관운장 이었다. 관운장은 그런 조조를 얼마든지 사로잡을 수가 있었으나 지난 날 그가 베푼 정이랄까 은혜랄까. 하여튼 그런 것을 생각하여 그가 그 곳을 통과 하도록 눈을 감아주었다. 이것은 관운장의 조조에 대한 의리(義理)라 할 수 있다.
신의와 의리,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도리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땅히 취해야 할 떳떳한 길이다.
사람이 신의를 얻지 못하면 세상 살기가 힘들고 아무 일도 도모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그를 믿어 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의리가 없으면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해 사람행세를 할 수가 없다. 사람으로 취급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불량 사회라고 부르는 뒷골목에서도 신의와 의리는 있다. 그들은 그것을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길 때도 있다. 그래서 못된 사람을 말할 때 ‘의리도 없는 놈’이라고 한다.
그런데 뒷골목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신의와 의리를 이제는 일반사회는 물론 심지어 고급 지도층 사회에서 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신의와 의리에 대한 모범을 보이고 또 솔선을 해야 할 지도층들이 오히려 상대를 불신하고 배신을 하고 더 나아가 모함 음해를 하고 있으니 실로 이 사회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생 동안 정을 나누고 운명을 같이 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 하루아침에 형제나 동지가 적이 되어버린 셈이다.
부자간 사이도 뜻이 다르지 않던가. 일생을 쌓아온 정과 신의를 그리고 의리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마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다. 관운장과 같은 신의와 의리가 그리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송월 스님 / 2020.07.15 16:3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