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가 볼 때는 다 같은 사람들인데, 남의 허물을 들어내는 일에 열을 내고, 비난받는 사람보다, 비난하는 당사자가 더 구린 곳이 많은 사람이 분명한데 정작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가 되어서 설교할 때 가장 괴로운 일은, 내 설교를 듣는 사람, 특히 내 아내와 가족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거였다.
“아이고, 너나 잘 하세요” 그러면서 속으로 비웃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감을 잃고는 했다.
본의 아니게 목회를 그만두고서 가장 자유로운 것이, 설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직이 전직인 만큼 설교하는 일을 아주 단절할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이런저런 행사에서, 강단에 오를 일은 이따금 이어졌다.
그러나 그때 내 설교를 듣는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기에, 목회할 때 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가장 잘 아는 세 사람을 앉혀놓고 설교하고, 유튜브에 공개한 지 2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바로 코앞에 앉아서 듣는 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설교할 자신은 별로 없다. 더구나 유튜브에 공개하기까지에는 참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인터넷과 SNS에서 틈만 나면 욕을 퍼붓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아는 저들에게, 과연 내 설교가 어떻게 들릴까? 아니 듣지도 않겠지만, 설교한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손가락질할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한국교회의 민낯이 속속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나 같은 존재라도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때 성도 중에서 어떤 사람이 눈에 띌 때가 있다. 대개는 뭔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거나, 문제가 보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연상하며 준비한 설교원고를 가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을 때, 정작 교인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설교를 듣고 달라져야 할 그 사람은,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럴 때 설교자는 실망한다. 자신의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실망이 들고, 그래서 서서히 그 사람을 마음에서 지우기 시작하고, 설교는 더욱 목회자 자신의 감정을 담기 시작한다.
언제나 자기의 설교는 가장 훌륭한 설교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 설교를 듣고도 달라지지 않으면 너는 구제 불능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목사의 설교에 은혜가 없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지만, 오히려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를 비평하고, 듣지 않고 변하지 않는 교인에 대해서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목회는 실패하게 된다.
실력이 없는 나로서는 월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한다. 성경을 통해서 먼저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서두에 “나를 위한, 나에 대한 설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준비하고, 나에게 설교하지만, 정작 내가 변하지 않는데, 누가 내 설교를 듣고 변할 것인가?
그러나 나에게 진정한 설교를 할 때, 같이 듣던 사람은 오히려 변화를 보인다. 외치는 나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로남불”이 아니라, “내불남로”여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내로남불”이 심한 사람은 목회자가 아닐까?
목회자여, 자기에게 설교하라!!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남대진 / 2021.11.30 15: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