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에 분유 회사에서 ‘우량아 선발대회’라는 것을 했었다.
자사 분유를 먹으면 아이들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우량아가 된다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해 우량아로 선발된 통통한 아이의 사진이 인쇄된 분유통들이 가게 진열대에 산처럼 쌓였지만, 누구나 다 그것을 사다 먹이기가 그리 쉽지 않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우량아로 자라지 못하는 아이의 부모는 가난한 부모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식으로 아이를 먹이고 양육한다면 그런 부모를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를 우량아로 키워내던 그 시절쯤에 한국교회도 그 규모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각 교단의 신학교에서 목사 후보생이 쏟아져 나왔고, 목사 안수를 받은 초짜 목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개척해서 자신의 목회를 해야 했다.
돈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교회 간판을 달기 위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돈에 맞춰 건물을 임대하고 교회 간판을 달았다. 지하실교회와 상가 교회가 넘쳐나고 건물 옥상마다 십자가 네온이 붉은빛으로 밤거리를 수놓았다.
문제는 교회를 개척 했으나 교인 모으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교인이 없으니 헌금도 없고 임대료와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서 늘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교인만 가득하다면 세계 최고의 설교가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가득했으나, 현실은 아이들 교육비조차도 만들어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살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교인 수를 늘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열심히 전도해야 하지만, 전도해서 교회 올 사람은 이미 어디든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아직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진작부터 교회 다닐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 아무리 돌아다닌들 그 시절 유행하던 월부책 장사만큼도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비슷한 처지의 목사들끼리 만나면 처음 나누는 인사가 “몇 명이나 모여?”라는 것이었고, 상대도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위로를 받는 그런 삶 속에서 예수 정신이 뭔지, 빛과 소금의 사명은 뭔지를 잃어버렸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 따위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누구든 끌어다가 예배당의 빈 의자를 채워야만 했다.
그래서 이단 사이비 사상을 들이고, 이웃 교회의 성도를 뺏어오고,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그렇게 본질을 서서히 잃어가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재주 많은 어떤 목사들은 날이 다르게 교인들을 끌어모아서 대형교회를 이루었고, 수많은 소형교회 목사들의 부러움을 사며 서서히 부와 권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수많은 교인을 앉히고, 유력 인사들이나 권력자가 드나들면 성공한 목사가 되었고, 교단에서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강단에서는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느라 열변을 토했고, 복 받기에 굶주린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버리고 대형교회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세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버티고 서게 되었다.
필자는 복부비만이 상당하다. 건설 현장에서의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손에서 연장을 놓게 되면서부터 움직임이 적어지고 체중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는 것이 불편하고 자연히 앉거나 눕는 자세가 늘어나게 되고 그래서 살은 더 찌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비만은 자랑할 일이 못 된다. 비대한 몸으로는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비대해진 몸을 자랑하던 한국교회는 이제 살을 빼야 한다. 자신의 체중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살을 빼고 날렵한 몸을 만들고 일을 해야 한다.
소금 덩어리가 햇살을 받아 아름다운 결정체만 자랑한다면 의미가 없다. 자신의 몸을 녹이고 숨겨서 음식물 속으로 녹아 들어가야 제 할 일을 하듯, 이제 교회는 자신의 몸을 녹여 감추고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지금 그 옛날 자랑스럽던 우량아는 사라졌다. 한국교회여, 이제 큰 몸 자랑질은 그만두고 살을 빼자. 비만은 만병의 근이다.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남대진 / 2020.10.29 11:2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