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에서 본디오 빌라도를 만난다. 라틴어 본명은 폰티우스 필라투스, 로마군인이다. AD 26~36년까지 유대 지역을 통치한 총독이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설명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처형당했다.”고 짧게 언급한다. 반면 성경은 빌라도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과정이다. 막14장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고 곧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다. 한밤중에 긴급 공회(산헤드린)이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예수님을 유죄로 판결하고 사형을 언도한다. 법적으로 사형 집행권이 없는 공회은 로마 총독은 빌라도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새벽에 급히 달려온다.
막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밤에 긴급히 공회가 모여 밤샘토론을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결론을 낸 후,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다.
막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직접 연관된 인물이다. 예배시간에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 이름이 등장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외울 때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본디오 빌라도인가? 그가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준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풀어주려고 노력하다가, 엉뚱하게 바라바를 석방시킨다. 엄격히 따지면, 빌라도보다 가룟유다가 훨씬 나쁜 사람이 아닌가? 때문에 사도신경에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고난을 받으사”로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왜 사도신경은 가룟 유다 이름이 아니라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할까?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당시 유대 총독이 빌라도이다. 역사적으로 AD 26-36년까지 총독을 했다. 사도신경은 빌라도를 언급함으로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를 지셨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공해준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영원한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 사도신경을 외울 때, “본디오 빌라도, 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라.
년도를 계산할 때 BC(before Christ, 주전)와 AD(Anno Domini, the year of Lord, 주후)로 한다.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년대를 계산한 것이 주후 500년 이후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계산법이 없었다. 고대 시절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년도를 계산하던지,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의 재임기간을 년도로 계산했다. 예를 들어, 눅2:1~2,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 당시 통치자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성경의 기록이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에 맞서,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는 시기에 분명히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떤 상징을 넘어, 나의 생명나무가 된다.
김민재 / 2019.02.12 1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