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선창을 지나 내항 뜬다리 부두를 향해>
강물을 바라보면 하염없고 어지럽다. 물이 들면 할 말 많았던 밑바닥 사연들까지 품 안에 거두어주지만, 썰물이 되어 허연 속살을 드러내면 상황은 달라진다. 모두가 넘쳐나던 시절을 지나 혼자 걷는 쓸쓸한 길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지금은 그렇게 많았던 갈매기들 또한 제 살길 찾아 떠나갔다. 지금 강 안쪽에는 몇 마리 남은 갈매기들이 마치 텃새로 정착했다. 그 새들은 오랜 토박이처럼 떠나고 돌아오는 이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떠나고 헤어지는 건 항구의 숙명이다. 이렇게 돌아오는 이들을 반기는 건, 사람으로 치자면 심장과 같은 기계 부품을 고치고 갈아주는 이들이다. 그들이 여기에서 긴 시간을 머물렀듯이 떠나지 못한 새들도 물고기처럼 회유하는 어선들과 배들과 어부들을 기다려왔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어두컴컴한 철문 안에서 오색 빛으로 날아가는 쇳가루에 믿음을 새겨놓았던 공업사 아저씨들처럼 내초라한 발길에도 새로운 생명의 소리가 움트리라. 초라함의 뒤 안에서는 그걸 뛰어넘는 일들이 무시로 일어서고 있으며, 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시간의 틈새에서도 노동의 귀한 결실이 살아났다.
그래서 작가 채만식은 “‘항구에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된다.”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
동부어판장의 허접한 잔상들을 뒤로하고 예전 섬마을을 다니던 연안여객선 터미널 건물을 지나 진포해양공원으로 접어들었다. ‘근대역사경관지구’라는 이름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물들과 건축물들에게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 전까지 군산 내항 일대의 쌀 수탈 현장은 볼 품 없었다.
갖다 놓을 게 없어 퇴역한 함정 등을 기증받아 어린이들이나 가금씩 찾는 외부인들에게 안보관광지로 개방하기 시작한 게 이 공원이다. 촌스럽고 초라한 게 군산 내항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라는 기억하기 싫은 역사적 사실을 근대역사경관이라는 가치로 포장하여 내놓는 오늘의 슬픔은 누가 위로할 것인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군산의 역사성이나 향토성을 생각한다면 군사적인 잔재가 아니라 어업사 유물 전시장이라든지 어구 박물관 등등 수산업이나 항구도시와 연관된 일들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
낡고 녹슬어 지쳐 쓰러져 가는 것들에게 ‘슬퍼 말아라, 슬퍼 말아라’ 위안을 주는 도선장 가는 길이다. 있는 길 위의 닻과 폐 부품들을 보면서 동강난 째보선창의 이력을 떠올린다.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의 영화를 간직했던 군산 동부어판장과 째보선창은 그렇게 쇠락해갔고, 어께를 함께한 내항과 부잔교(뜬다리)와 뱃터는 모두 뻘의 습격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떠나고 돌아오는 고동소리와 왁자한 아귀다툼이 없어졌다고 해서 오늘의 선창이 사라진 건 아니다. 긴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엔가 새로운 의미가 새겨지면서 생명을 얻고, 새로운 길을 가는 일과 다름없으리라. 그렇게 세상 속으로 이 선창과 내항을 떠나보낸다.
채명룡 / 2018.09.10 21:1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