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교육이나 윤리와 도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종교나 교육과 윤리 도덕이란 우리에게 아직 있긴 있는 것인가.
왜 이런 의문을 새삼스럽게 가져보느냐 하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그런 의문과 회의를 안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질이 인간을 제도하고 사회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정화하는 것이라면 또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발휘해야만 종교와 교육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하고 그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의문과 회의는 더욱 짙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그 내용이야 어떻든 형식으로나 형태적으로 볼 때 종교나 교육은 있기는 있다. 오히려 그 형식과 형태는 교육과 종교에 있음을 두말 못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기도 하다.
우선 현실을 보자. 옛날에 비하여 어떠하던가,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학력자가 주변에 즐비하다. 문체부에서 발표한 종교 관계의 통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된다.
여기에 사찰, 교회, 성당, 교당(교육기관)과 종교 교역자와 교육 지도자의 숫자만 하더라도 어마 어마하다. 하긴 문체부의 이런 통계는 뒤로 하더라도 우리 주위에 종교와 교육이 현상이 결코 적지는 않다.
요즘 우리 사회의 밤 풍경을 본 사람은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락없는 화택(火宅), 불난 집처럼 세상이 온통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다. 이런 현상은 도시일수록 더 심하다. 바로 종교적 상징물 들이다. 그렇게 천지는 종교와 교육시설이다. 그만큼 배움의 교당(敎堂)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찰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찰은 깊은 산중이나 가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웬 만한 도시 가운데도 포교당 간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이 된다. 그만큼 사찰도 또한 많아진 셈이다.
옛날 우리 어릴 적에는 일요일에 빨간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가는 사람을 어쩌다 보면 이국(異國)의 정(情)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요일은 교회나 성당 가는 일은 일상생활이다.
이렇게 종교를 상징하는 교당과 종교인. 교직자들이 사회에 물결치고 있는데도 교육 부재, 종교 부재를 실감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요즘 뉴스나 일간지 신문을 들여 다 보면 선거문제로 티격태격 공방을 하고, 보험금 노려 아내 살해, 노총각 비관 농촌청년 자살, 마약사건, 국정 원 여직원 감금, 정치인의 땅 투기, 부모살해, 10청소년의 흡연 음주난동, 여성 시신 유기, 연쇄 살인, 성직자 실형선고, 신변보호 전 가족 살인, 허위경력 논란, 동거녀 찌르고 19층에서 내던진 남자, 성노예, 경찰관 현행범 체포, 바람피운 아내 폭행 치사, 여성 화장실 도청, 대장동 사건 등으로 가득하다.
전 국민이 3분의 1 이상의 종교인을 가진 나라의, 또 교육기관과 교육자들이 널려 있고, 사찰과 교회 성당으로 교당이 널려 있는 나라, 그래서 감히 종교와 교육의 천국이랄 수 있는 우리의 현주소며 상황이다.
도대체 그 많은 교육시설과 교당(敎堂)은 무엇 때문에 있고, 그 많은 신도들은 무엇 때문에 종교를 갖고, 또 그 많은 교직자들은 하는 일이 무엇이고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의도 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산승(山僧)인 필자로서는 도대체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사고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당에 가서 병 낫게 해주세요. 돈 좀 벌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남편 출세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고 또 빌며 기도를 한 다라면 어느 성현이 그러한 정말 알음이나 할까.
사실, 이렇게 소원을 비는 일이란 종교(宗敎)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짓들이다. 자성(自性)인 존재의 가치를 한 단계 고급화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종교요 교육의 참 뜻 임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출요경 말씀이다.“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라 남을 따라서 남을 스승으로 삼지마라 자기를 잘 닦아 스승으로 삼으면 능히 얻기 어려운 지혜를 얻으리라.”
송월 스님 / 2021.12.21 18:3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