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일이다.
석탄일이 가까워지는 시기, 남한강 변에 가면 자라나 잉어 가물치 등을 산채로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대야에 담긴 물고기들 옆에는 “방생하세요”라는 표식이 있었고, 가끔 어떤 이들이 한 마리씩 사 들고, 바로 장사꾼 옆의 강변에서 그 물고기를 방생한 후 합장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다.
방생이라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사야 하니 누군가는 잡고 그 고기는 돈에 팔리고 다시 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물고기는 자비를 베푼다는 사람을 위해 낚시에 걸리고, 낚시꾼은 자비를 베푸는 데 도우려고 물고기를 잡는다. 낚시꾼은 돈을 벌어 만족하고, 중생은 방생의 자비를 베풀어 만족한다. 그렇게 잡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느 사람에 의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물고기의 처지에서 보면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까?
교회에서는 연말은 물론이고, 수시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앞선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교회로써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이렇게 구제하는 일이다. 그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지 그것은 모르지만, 아무튼 교회는 그래야 한다.
선물 꾸러미와 음식을 들고 나누면서 사진을 찍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면 안 되니까” 요란하게 보도자료를 내고 온 세상에 다 알린다. 물론 말 그대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진정한 예수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더 많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잊거나 모르는 일이 있다.
교회가 도와야 할 그 많은 가난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과거 중세시대 수도원 주변에는 꼭 보육원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하는 것도 아닌데 왜 부모 없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자라야 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수도원에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모아 보살피는 선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아이들은 사제들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들은 누구였을까? 수도원에 있는 수녀들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결혼하지 않는 사제와 수녀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렇게 보육원에서 자라고 수도원의 사제와 수녀들은 마치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보살피는 자비로운 모습을 연출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시절의 모든 보육원이 다 그런 형편이었다고 일반화하지는 않겠다.
돕고 나누고 섬기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가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기득권과 손잡고 만들어 내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아닌 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악과 싸워야 하는 것이 우선 할 일은 아닐까?
내가 돈 몇 푼 쥐여 주며 생색내는 저들은 나 때문에 생겨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는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남대진 / 2023.05.26 10:3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