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20:7-12
행 20:10, 반전된다. 설교 듣다가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단어가 있다. 바울이 외친 말이다. “떠들지 말라.” 말하지 말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울며불며 야단법석을 떨 때 사용한 단어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유두고가 정말 죽었던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죽었다고 판단한 의사 누가의 오진인가?
아니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는 말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행 9장, 베드로는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린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살린다.
행 20:11, 떡을 뗀다. 7절, 떡을 떼려. 바울의 설교가 길어져 못했던 성찬식을 행한다. 성찬 후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새벽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바울은 드로아를 떠난다.
행 20:12, 살아난 청년은 곧 유두고다. “데리고 가서” 다락방으로 데리고 왔거나, 예배 마친 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유두고 사건이 그들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다.
본문은 어떤 메시지를 주나? 설교 시간에 졸면 죽는다는 경고일까? 예배 때 졸아도 되나? 된다. 유두고는 예배 자리를 지켰다. 졸려 집에서 주무시는 것보다 졸아도 예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대로 적용하기도 한다. 졸리는 설교하면 죽는다. 교인들 졸게 하는 일차 책임은 설교자에게 있다. 잠이 쏟아지는 설교를 한다면 설교자의 책임이 크다.
졸음 마귀가 틈타지 않을 정도로 설교해야 할 설교자의 책임이다.
유두고 사건을 통해 어떤 위로를 받았나?
다시 시작함의 위로, 그리고 다시 살아남의 위로다. 유두고 사건을 예기치 않은 황당 사건이다.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예배를 통해 다시 일어서고 시작하게 되었다. 유두고는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 부활이다.
바울은 유두고가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다 보고 있다. 그래도 설교를 계속한다. 일부러 더 길게 설교한 것이다. 왜? 유두고는 떨어져 죽을 때까지 설교를 계속한다. 떨어져 죽어야 다시 산다. 설교가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나 떨어지라는 것이다.
설교 듣다가 세상 적인 것은 떨어져 죽어야 한다. 세상 욕심도 떨어져 죽어야 하고, 가슴 상처도 떨어져 죽어야 하고, 욕심도 떨어져 죽어야 하고, 땅의 것은 떨어져 죽어야 하늘의 것, 영생의 것으로 다시 산다.
유두고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중요하다. 7절, 그 주간의 첫날이다. 주일이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예수님 부활하신 날 유두고는 설교 듣다가 죽고 부활했다.
유두고는 누구인가? 바로 내가 유두고 이다.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활로 다시 산다. 하늘의 생명을 얻는다. 위로를 받았더라.(끝)
차상영 성광교회 담임목사 / 2022.10.12 11:3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