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4:10-11,
맹구가 입대 통지서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군대에 안 갈까 고민하다가 신체 검사받으러 가기 전날 손가락 하나를 자르기로 결단을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는 어림없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을 잘라야 면제된다”라고 충고를 한다. 눈물을 머금고 손가락 두 개를 절단하고 신체 검사장에 갔다. 신체검사를 마친 후 검사관이 최종 판정을 내린다. "맹구 군대 면제!" 그리고 덧붙이는 말, "평발" 어리석은 행동을 한 맹구가 탄식하며 하는 말, "아이고 분하고 억울해"
마리아와 가룟 유다
맹구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을 한 사람이 오늘 성경에서 만나는 가룟 유다이다. 유다란 이름의 뜻은 찬송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이름인가? 그런데 가룟이란 지명(헤브론 남쪽에 있는 곳, 영어 이름은 이스카리옷)을 붙여 가룟 유다 이름은 전혀 다르다. 배신자, 위선자, 거짓말쟁이, 가짜란 의미다.
막14장에 전혀 다른 두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마리아로 지칭되는 한 여인이다. 매우 값비싼 나드산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드린다.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기대 이상의 행동을 한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기대 이상 감동의 말씀을 하신다.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여자가 부어드린 향수는 사랑이다. 사랑은 낭비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다. 헌신이다. 몽땅 부어드렸다. 예수다. 여인 안에 예수가 있으므로 예수를 부어드렸다. 진짜 예배다. 여자의 행한 일은 최고의 예배다. 예배를 드릴 때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의 복이 임한다. 예배를 드릴 때 치유 기적이 있다. 예배드릴 때 하늘의 복을 받는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두 번째 인물이 가룟 유다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 십자가를 준비했다. 예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믿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 십자가를 거부한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지만, 전혀 다르다. 교회 안에 마리아와 가룟 유다가 공존한다. 마리아 옆에 가룟 유다가 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막14: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생일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밥만 축내면서~ 왜 태어났니~”가룟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 마리아와 비교된다.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마다 마리아, 마리아, 그렇게 마리아. 복덩어리로 기억된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저주받은 인물이다.
일본의 어떤 수도원에 나무 열두 그루를 심고, 나무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팻말로 써서 붙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가룟 유다 이름을 붙인 나무가 시름시름 죽어간다. 누군가가 베드로 팻말과 가룟 유다 팻말을 바꿨다. 며칠 뒤, 죽어가던 나무는 살고, 멀쩡하던 나무는 죽어갔다. 몇 번 팻말을 바꾸었다. 그때마다 가룟 유다 팻말의 나무는 죽어갔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가룟 유다 이름이 붙은 나무에만 한마디씩 저주를 했다.
이상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가룟 유다는 억울하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희생양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지 않았고, 십자가가 없었다면 구원도 없다는 논리를 편다. 그럴듯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전혀 성서적이지 않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다. 예수님의 말씀(설교)을 직접 들었다. 갈릴리 팔복 기념교회당에서 갈릴리 호수 향해 아래쪽으로 내려다가 보면 바위가 있다.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앉아 있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상상만 해도 행복하고 좋다. 가룟 유다는 직접 예수님 설교를 들었다.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그러나 축복을 저주로 바꿔버렸다. 안타깝다. 축복 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바로 내 몫이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은 예정론적으로 배신자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의 기회를 발로 차 버렸다는 것이다.
구두닦이가 우연히 복권 한 장을 샀다. 10억 원에 당첨되었다. 그는 한강 옆을 지나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이 구두통은 필요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 먹고살던 구두통을 발로 차 한강에 던져 버렸다. 통쾌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부자다.” 집에 돌아와 복권을 넣어둔 주머니를 찾아보았는데 없다. 순간, 땅을 치고 통곡한다. 구두통 속에 복권을 넣어 두었던 것을 몰랐다. 가룟 유다는 복을 걷어차 버렸다.
계속되는 영적 전쟁
가룟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나? 답이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를 팔아버리려고 하는 충동은 마귀에게서 왔다.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자 길을 걷게 된 배후세력이 있다. 가룟 유다가 아니라 가룟 유다 뒤에 있었던 마귀다.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왔다. 세 번이나 유혹한다. 그때마다 말씀으로 물리쳤다.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미리 말씀하실 때 마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집어넣었다. 마귀는 지금도 계속 심방 온다. 교만으로 찾아오고, 명예욕, 물질 욕으로 심방 와서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고 배신하게 한다.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도 왔고 베드로에게도 왔고 예수님에게도 왔고 나에게도 오고, 자녀에게도 온다.
영적 전쟁의 현장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한다. 오늘 죄를 이겼다고 해서 내일 또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매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행1:18은 가룟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말씀한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김민재 / 2018.08.12 16:2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