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선창의 아침>
선창에서는 눈이 내려도 좋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색을 눈발에 감추고 있지만 감출수록 안쓰러움은 짙게 배어나왔다. 눈발에 붙은 몇 가닥의 바람에 아스라하게 간직하여 왔던 바지선들의 지난 세월들이 휘영청 밧줄에 매달렸다.
회색빛으로 변한 일제강점기 동부어판장 건물은 새로운 재생의 현장이 될 것이다. 그 앞은 해산물과 어구 판매장이었다가 지금은 선박수리점이고 그 중간에 어울리지 않는 수문 하나, 긴 시간을 외롭게 견디고 있다.
이 수문이 예전 째보선창을 복개하여 주차장으로 만들고, 하천이 지하로 바뀌면서 온갖 허드렛물을 흘려보내왔던 내항수문이다.
터지는 상처를 드러내 놓다 마는 이 선창에서 옛이야기를 내놓는 건 바보짓이다. 나는 암담했던 날들이여 안녕, 하며 돌아섰다.
겨울 아침이라 호젓한 선창 길이다. 이 길에서 펄떡이는 생선의 자유와 뱃사람들의 귀향과 악다구니 쓰던 장사치들과 마도로스의 사랑과 애증이 잉태되고 떠나갔을 터이다.
그렇듯, 추억은 그리움이다. 그 아련했던 날들을 기억하며 나는 한가로워서 더욱 애잔한 째보선창을 걷는다.
나무판자로 바람을 막고, 생선 비늘같이 날렵하게 뼈대를 세웠던 앙상했던 건물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다. 일제 강점시대의 동빈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선을 잡아 돌아 온 새까만 얼굴의 뱃사람들, 그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걸 일제가 착취해 가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모진 바람과 파도를 맞고 싸워 얻은 생선들을 좋은 가격에 거래해주려고 문을 열었던 이 건물은 1993년에 시작되어 2002년 마무리된 한중 어업 협정 등의 풍파 앞에서 그만 좌초되고 말았다.
선창 골목은 사계절이 다르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지만 서늘한 한기가 살갗을 간지럽게 하는 여름도 좋고, 갯가로 갈기(게)들이 미어터지게 나오는 늦봄도 좋다. 몇 줌의 햇살로 한 끼를 때우는 풍요의 가을을 지나 귓불이 빨개질 정도로 추운 날에 걷는 선창도 그만이다.
겨울, 눈 오는 날의 선창은 그동안의 수고를 싹 덮어주는 것 같다. 소복하게 덮인 선창 강변으로 난 시멘트 길을 한 발씩 걷는다. 미끌미끌 조심스럽다.
선창 아래로 드러난 옹벽과 돌무더기들을 보면서 긴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이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다 고개 들어보니 손에 잡힐 듯 흑암 등부표가 서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 곳을 찾아 돌아오는 어선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고 한다.
그렇구나. 길을 밝히는 건 순간이 아니라 긴 시간이 필요하구나 하고 깨닫는 아침이다.
채명룡 / 2018.07.11 09:3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