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사람들과 영원한 동행인 월명공원으로 들어섰다. 1990년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당시 국립박물관으로 활용되었던 옛 중앙청 건물도 철거 되었다.
이게 옳은 일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명산동 동국사에서 월명산 오르는 입구, 예전에 삼일공원으로 부르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월명공원에 남아 있던 일재의 잔재물을 철거하기 위해 시민운동이 벌어졌던 장소이다.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들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비판 세력은 마치 부도덕한 부류로 취급되었다.
역사바로세우기에 편승한 일부 세력에 의해 일제 침탈과 강점의 증거들이 일사천리로 철거되었다. 그 사실은 마치 독립운동 하듯 미화되었다. 일제 침략과 수탈, 민족 정기를 가다듬을 수 있는 핵심 증거들이 파손되고 사라졌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농장과 정미소를 경영하며 군․옥 농민을 수탈했던 일본인 모리구끼(森菊五郞)가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보국탑이 있던 곳에 다다랐다.
1995년 5월 1일의 일재잔재철거 개막식에 이어 한 달여 동안 월명산의 보국탑을 비롯한 성사당, 자우혜민비, 개항35주년기념탑 등이 철거되었다. 역사적 가치 주장이 제기되자 철거 후 일제의 만행을 전시하자고 합의했다. 2012년부터 15점의 석조 부스러기들만 근대역사박물관 한편에 초라하게 남겨져 있을 뿐이다.
월명공원 일제잔재 철거에 앞장서면서 중요 문화예술계 인사로 행세했던 인사들을 떠올렸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근대문화를 내세우는 오늘에 이걸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갔던 그 날의 ‘눈에 보이는 걸 없애면 마음속에서도 지워질 것’이라 여긴 듯했던 파괴적인 행동과 당위성 논리는 차마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거대한 해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필자를 비롯해서 문화예술인이라고 한다면, 일제잔재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졌던 반역사적 행위를 비판하지 않은데 대해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날의 시간들이 월명산 나무가 자라듯이 흐르고 흘러 근대역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의미가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거했던 일제강점의 증거들을 이렇게 둔다면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근대역사 박물관 한편에 조각조각 남아 그들의 흔적만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복원은 아니더라도 그 당시의 파괴적인 사진 자료나 행위들을 전시하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적어도 근대역사경관지구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하려고 한다면 일제 강점기의 침탈 증거들이 훼손되고 사라진 과정이라도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일부 역사 연구 단체들과 인사들이 앞장서 파괴한 이런 행동에 대해 어떤 방식이든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본다.
군산은 골목도 골목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고 높다.
채명룡 / 2018.08.27 18: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