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13:42-52
이방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나? 48~49절. 움직씨에 주목하자. 듣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믿고 퍼졌다.
주어가 “나”가 아니라 “성령님”이다. 성령이 하신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모셔 들이면 된다. 설교가 들리게 한다. 설교가 들릴 때 기쁘다. 행복하다. 입이 열려 찬송이 터진다.
트로트보다 복음성가가 좋다. 찬송을 즐겨듣고 부른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 성령의 역사다.
똑같은 설교를 들었지만, 정반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50절. 접속사, 데(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강하면 마귀도 세게 나온다.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과 비시디아 성읍의 지도층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추방한다. 두 사도는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간다.
설교자의 무한 책임이 있다. 설교 잘해야 한다. 쉽고, 짧고, 재미있고, 성경적인 설교를 잘 준비해야 한다. 설교 전달도 잘해야 한다.
은혜받는 것은 설교자 책임 영역이 아니다. 설교 듣는 성도들의 자세에 달려 있다.
은혜 사모하면 설교 통해 은혜 주신다. 마음 문을 열며 은혜 쏟아 부어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52절. 제자들은 사도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힘들어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설교 반응이 제각각이다. 감동 받고, 은혜받고, 설교자를 환영 할 수도 있고, 마귀에게 선동당하여 반박하고 비방하고 박해하여 설교자를 쫓아낼 수도 있다.
감동인가? 선동인가?
설교는 성령 충만으로 받으면 감동이다. 설교에 감동 받고, 은혜받으면 살림의 역사가 일어난다.(끝)
김민재 / 2021.08.18 10:02:37